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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18 21:05
복음의 불모지에 말씀을 싹 틔운 맨발의 권서인 소요한 (1892~1958)
 글쓴이 : 예수말씀
조회 : 3,642  
   복음의 불모지에-소요한장로 주간기독교(2009).hwp (352.0K) [14] DATE : 2009-09-18 21:05:07
주간기독교 제1779호(2009년 9월 20일)

복음의 불모지에
소요한 (1892~1958)
 
이연경 (기사입력: 2009/09/14 09:55)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어두운 밤, 찬송가 소리가 곱등고개를 먼저 넘어온다.
“와~아버지 오신다.”
찬송가 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들은 호롱불을 들고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권서인’을 아버지로 둔 6남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항상 그리운 존재였다.
스물일곱에 시작한 권서(勸書) 일은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사역이다.
한 번 전도를 나가면 일주일은 보통이고, 경우에 따라 한 달 이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곱등고개의 추억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준 아버지는 권서 일을 소명으로 알았다. 그가 바로 계속되는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쉬 닳아버리는 고무신 대신, 맨발로 말씀을 전하러 다니던 소요한 장로다.

 

◇경성성서회관급권서총회


소요한(蘇堯翰) 장로의 본래 이름은 소훈식(蘇勳植)이다. 1892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보라리(현재 민속촌 자리)에서 소봉영(蘇鳳永)의 삼남매 중 외아들이요,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소훈식은 7살에 어머니를 잃고, 10대 시절부터 신앙을 갖게 됐다. 소훈식은 김양(지금의 용인)에서 8Km 가량 떨어진 오미실교회에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18세에는 훈장 일을 보던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다

이웃사람들은 예수 믿는 청년이 멀리 떨어진 교회에 나간다는 소식에 ‘아리실’에도 교회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소훈식은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아리실로 들어갔다. 선교사들이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날 연보(日捐補 시간 연보)’를 권장하던 때였다. 훈장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터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통해 한글도 자연스레 깨쳤다.
부모를 잃고 어렵게 생활하던 소훈식은 아리실의 어느 집 머슴으로 일했다. 집주인은 그를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해 데릴사위로 삼고자했지만, 교회를 다니는 일은 영 못마땅했다. 소훈식이 온전한 주일 성수를 위해 주일 품삯을 아예 제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교회에서 받은 성경과 달력이 온데간데 없었다. 주인은 “내가 모두 뒷간에 버렸으니, 딴 생각 말고 짐승처럼 일이나 하라.”고 말했다. 그날로 집을 나온 소훈식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오미실에 정착했다.

 
◇소요한 장로 부부의 환갑잔치, 고된 사역으로 건강을 해쳐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인다.

결혼 후 개명하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익현(崔益鉉)의 사위 윤영채가 오미실로 찾아왔다. 윤영채는 소훈식의 손을 덥석 잡으며 “훈식아! 내 딸을 네게 주마! 내 딸하고 결혼해라.”고 말했다. 가을걷이를 하던 소훈식은 깜짝 놀라 오히려 반문했다. “제가 아리실에서 남의 집 머슴 살던 사람인 줄 모르세요?” 윤영채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 이런 건실한 사람도 드뭅니다. 예수 잘 믿는 청년이오.”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사윗감을 찾아 그 먼 길을 올 만큼 소요한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이렇게 소훈식은 스물네 살의 나이에 최익현의 외손녀인 열일곱의 윤금성을 아내로 맞는다. 결혼 후, ‘소요한’으로 이름을 바꾼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을 본받는 삶,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굳은 결단을 이름에 담았다.

 
◇소요한 장로의 셋째 아들 소동욱 집사 부부

권서인으로 부름 받다

소요한 장로는 2년 후인 27세의 나이에 오미실 근처 김양교회의 장로로 장립됐다. 결혼 후 부인은 김양에서 냉면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장로가 되자 곧 가게를 처분했다. 주의 종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가 세상일에 몰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신앙적 결단이었다.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던 소요한 장로는 김양교회의 조사로 일하던 유 장로에 의해 대한성서공회 권서인으로 천거된다.
초기 한국 교회의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은 당시 성경을 번역, 출간하던 대영성서공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지금의 대한성서공회) 소속 직원으로, 성경(단권 성경과 쪽복음)을 판매하던 매서인(賣書人)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권서인을 단순한 책장수로 보지 않았다. 교통편이 어려운 시절,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 다리로 누비며 가가호호를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권서인은 복음의 최전방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당시 권서인의 첫째 조건이 ‘믿음’이었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당시는 1900년대 초, 모두들 어려운 처지라 끼니를 걱정하는 형편에 쪽 복음과 성경책을 사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거저 주다시피하며 말씀을 전했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침술과 한약재 짓는 훈련을 받았던 터라 사역지 곳곳에서 만나는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소요한 장로의 권서 사역은 1938년 은퇴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계속됐다. 처음 맡은 전도 구역은 경기도 남쪽 지역이었는데 서울-판교-용인-죽산-진천-증평-청주-보은-영동을 도맡아 다녔다. 셋째 며느리인 장예(張禮 영락교회 은퇴 권사) 권사는 소요한 장로가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다녔었다고 증언한다.
해가 저물어도 묵을 곳을 찾지 못해 노숙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야 하는 전도사역에 몸은 지치지만,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시장기를 견디다 못해 남의 옥수수 밭에 들어가 옥수숫대를 붙들고 그 집안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날 옥수수로 주린 배를 달랬다. 어떤 때는 날 콩 한 줌으로 시장기를 면했다. 고무신을 아끼기 위해 맨발로 다니다가 전도하려는 동네 어귀에 다다라서야 신발을 꺼내 신었다. 얼마나 걸어 다녔던지 발바닥에는 거북이 등딱지 같은 굳은살이 박혔다. 가을에 밤송이를 깔 때는 맨발로 밟고 서서 뒷꿈치로 깔 정도였다. 발뿐 아니라 등에도 굳은살이 박혔다. 권서 일은 많이 걷기도 했지만 무거운 짐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책과 쪽 복음을 담은 궤짝을 그대로 등에 지고 다닌 탓에 등에는 기역자 모양의 굳은살이 박혔고, 어깨에는 궤짝을 둘러맨 새끼줄 자국이 뱀 모양의 흉터로 남았다.

 
◇1923년 대영성서공회에서 발간한 국한문 신약전서. 소요한 장로는 각 장의 여백을 설교를 위해 인용할 내용들로 빽빽히 채웠다.

수역교회를 개척하다

권서직에서 은퇴한 소요한 장로는 경기도 용인군 원산면 문시랑(지금의 문촌리)에 살다가 1940년 3월 13일, 서울 영등포로 이사했다. 소요한 장로는 영등포교회에 출석했다. 1943년에는 시무 장로로 취임해 봉사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30일에 처가가 있던 아리실로 피난을 간다. 생계를 위해 한약방을 운영했는데 몇 달 새, 쌀 네 가마를 모으게 되었다. 다음해 이른 봄 그것을 가지고 인근 마을인 이동면 어비리 수역이라는 마을에 있는 흉가를 사서 다시 이사했다. 8개월 동안 마을 주민에게 복음을 전한 소요한 장로는 1952년 1월 3일, 동네 주민 40여 명을 사랑방에 모아 수역교회를 창립한다. 6년 뒤인 1958년, 오직 복음 전도의 사명을 붙들고 살아온 삶을 하늘의 부름으로 내려놓는다.
소요한 장로가 세운 수역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민병억 목사가 전도사 시절(1960~1962) 시무한 교회로, 현재까지 전형적인 농촌교회의 모습으로 수역동을 지키고 있다.
소요한 장로의 믿음을 유산으로 받은 셋째 아들 소동욱(蘇東煜 영락교회 은퇴집사) 집사는 아버지를 ‘철저한 신앙인’으로 기억한다. 소동욱 집사가 군대를 가고 어려운 형편중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던 시아버지의 사역에 동참했던 장예(張禮 영락교회 은퇴권사) 권사와의 사이에 7남매를 두었다. 자식들 중 5명을 목회자로 길러냈는데 장남 기천(基天)은 장신대 신약학 교수다. 차남 기호(基昊)는 일본인 선교사와 다까하다 교회 담임목사로, 기범(基範)은 미국 보스턴대 교수로, 장녀 기은(基恩)은 장로로, 자부 중에 정민임(丁敏任)과 최희안(崔喜安)은 목사로 각각 일본과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초기 한국 교회에 있어 중요한 활동가로 꼽히는 권서인의 한 사람이었던 소요한 장로. 그 걸음걸음을 통해 한반도 구석구석 뿌린 복음이 싹을 틔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소기천 교수

<역사 전승의 문서화에 힘쓸 터>
소요한 목사의 손자로 5대째 신앙을 이어오고 있는 소기천 교수는 “할아버지가 말씀 중심으로 사신 게 늘 귀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선교 초창기, 미신과 여러 신앙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던 때에 할아버지께서 신약성서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 것이 복음전도의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이었다.”고 말한다.
소기천 교수는 현재 소요한 장로의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본받아야 할 사람 중에 초기 교회 순교자들이라든지, 자기를 희생하면서 전도인의 삶을 사신 분들을 많이 꼽는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할아버지야말로 그런 선배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귀한 신앙의 발자취를 남기신 분이다. ”
대한성서공회에는 권서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대한성서공회 역사의 큰 부분이 권서인의 역사인데, 20년 넘게 대한성서공회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줄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나뿐아니라 다른 믿음의 자손들도 구술전승을 토대로 역사적 사실을 복원해 글로 남기는 작업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후손들이 직접 나서서 집안의 신앙적인 내력을 글로 남겨 놓아야 후대에까지 그 귀한 사실이 전해지는 역사 전승의 문서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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